언론의 잘못된 문화예술 관련기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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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16 00:24:10
조회 : 11063
Name 무용평론가 송종건
Subject 언론의 잘못된 문화예술 관련기사들
Homepage http://dancecritic.com.ne.kr
< 언론의 잘못된 문화예술 관련기사들 >
근래 우리나라 문화관광부 장관이 바뀌었다. 정동채 장관에서 작년 말 국립극장 장을 그만둔 김명곤씨가 새로운 장관이 되었다. 이런 변화에는 정치적 고려도 있었는데, 전임 정동채장관이 여당에서 바라는 지역 선거에 출마하려하지 않았다는 배경이 있었다. 한마디로 어부지리식의 뜻밖의 인사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어부지리의 결과라고 하더라도 문화예술 현장을 피 말리는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는 평자의 입장에서 전혀 이해가 되지 않던 것은, 평소 문화예술발전에 실질적인 기여를 그리 많이 하지 않은 것 같은 사람이 너무 승승장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김명곤씨가 장관에 내정되자말자, 어느 신문에서는, 김명곤씨가 국립극장 장 재임기간동안, “극장을 리모델링하고, 대극장의 이름을 ‘해오름극장’으로 바꾸고, 소극장 이름을 ‘달오름극장’으로 바꾼 업적을 이루었다”는 거의 용비어천가 식의 기사로 띄우고 있기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명곤씨가 국립극장 장을 하는 6년 동안, 국립극장의 모습을 지켜 본 평자가 보기로는 - 물론 무용의 입장에서 본다 -, 국립무용단의 창작의 질은 형편없이 떨어졌고, 심지어는 아예 공연을 하지 않는 국립무용단이 되어있었다. 즉 김명곤씨 재임 이전의 무용공연장이 훨씬 더 활기찼다는 것이다.
그런데 극장을 리모델링하고 - 이 부분도 정확히 보면 아직도 소극장(즉 달오름극장)에서는 대부분의 좌석이 앞사람의 머리 때문에 무대가 보이지 않는다 -, 극장의 이름을 바꾼 것이 무슨 대단한 업적으로 적고 있다는 것이다(그런데 며칠 후에는 다시 이 신문에서 김명곤씨의 허위이력서, 부동산투기, 딸의 자원봉사실적 내역조작 등등의 기사를 싣고 있기도 했다).
근래 인터넷의 발달로 사회의 의사소통이 다양해지고 있다. 특히 미국 등에는 블로그 게시글이 오보를 일삼는 주요 방송의 뉴스 본부장 등을 사임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즉 미국 CNN의 이슨 조던 뉴스 본부장이 “이라크에서 미군의 총격으로 사망한 언론인 가운데 일부가 표적 살해되었다고 믿는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후, 조던이 발언한 현장에 있던 로니 알보비츠라는 블로거(의료기술업체 사장)가 ‘미군은 이라크에서 언론인들을 겨냥 했는가’ 하는 글을 올렸고, 결국 이슨 조던은 사임했다고 한다.
그리고 미국 대통령 선거 캠페인이 한창이던 지난 9월 CBS 방송의 간판 앵커 댄 래더는 CBS의 인기보도 프로그램 ‘60분(Sixty Minutes)’에서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주방위군 복무시절의 특혜의혹을 제기했는데, 한 블로거가 “보도의 근거가 된 당시 부시 상관이 남긴 메모는, 30여 년 전의 것이 아닌 최신형 타자체로 작성된 위조”라는 반박을 받고 은퇴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인터넷 매체가 발달하고 사회의 의사소통 채널이 다양화되었다고 하더라도, 아직 신문, 방송 등 언론의 영향력은 크고, 독자나 시청자들의 믿음은 크다. 즉 아직 많은 독자들이 신문이나 방송 등 언론은, “가만히 놓아두면 부패하고 썩어 들어갈 사회 구석구석 문제들을 지적하고 들춰냄으로서 건전한 공동체를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다”고 신뢰한다는 것이다.
이는 조선일보 2005년 8월 8일자에 보도된 미국 성인들의 언론에 대한 태도 조사에서도 확인된다. 즉 20년 전 미국인들의 84%는 신문에서 읽은 내용을 대부분 믿는다고 했지만, 2004년 조사에서는 54%에 불과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기사는 놀라운 희소식이라고 하면서, 그래도 미국인들이 주류언론에 대해 여전히 우호적이라고 한다.
즉 이 조사에서 신문에 대한 호감도는 80%, TV 뉴스는 75%였는데, 대통령과 의회, 정당, 대법원보다 앞서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미국인들은 언론을 예전처럼 믿지는 않지만 신문이나 방송은 좋아한다는 모순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고 보도했다.
결론적으로 보면 신문 등 언론보도에 대한 완벽한 신뢰는 사라졌지만, 아직도 그 영향력과 독자들의 신임이 크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문 등 언론보도는 그만큼 더 큰 책임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정작 문화예술 관련 글쓰기를 하는 사람으로 걱정이 되는 문제는, 이런 신문 등의 영향력을 이용해 로비를 하는 사이비예술가들이 많다는 것이다.
사실 언론은 특성상 이름이 있는 사람을 쫓는 경우가 많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황우석 사태’가 될 것이다. 그 결과의 폐해는 너무 컸고 국민 모두 뼈저리게 느끼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더 이상 거론하지 않겠지만(시간이 아깝다), 근래 다시 “그 당시 황우석을 취재하던 기자들이 황우석의 신용카드로 고급술집을 마음대로 드나들었다” 라며 들리는 새로운 소식 등은 분노스럽기만 하다.
잘못된 로비에 말린 것 같은 언론의 보도는 문화 예술면 에서도, 앞의 김명곤씨 예같이 흔히 접하게 된다. 왜 이런 문제가 야기되었는가? 첫째, 신문사 등의 기자들이 담당 분야에서 ‘전문가’가 아닐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언론사들끼리도 흔히 서로가 문제점으로 거론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신문에서 방송 PD들의 취재 능력을 비판하면서, “전문취재 인력 없이 교양 PD가 시사영역을 다룬다”고 비판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기자들의 부서는 바뀌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대부분의 기자들은 취재 대상이나 예술에 대한 깊이 있는 전문성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더 더욱이나 언론에서는 스스로 최고라는 생각에 잡혀, 담당 업무분야의 전문가의 이야기를 들을 자세도 되어있지 않다. 예를 들면 미국의 뉴욕 타임즈, 파이낸셜 타임즈 같은 유수 권위지 같은 경우는 큰 비중으로 전문가의 공연리뷰를 실어, 건전한 문화예술발전을 도모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신문은 그러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신문 등 기사들이 대부분 수용자인 독자의 입장에서 쓰지지 않고, 공급자의 입장에서 쓰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신문 등에서는 가난한 서민무주택자의 입장에서 쓰지 않고, 천문학적인 폭리를 취하는 건설사의 입장에서 글을 쓰고, 살인적인 휴대전화 요금 문제 등도 서민의 입장보다는 서민들의 주머니를 털어가는 이동통신사의 입장에서 글을 쓴다는 것이다.
엄청난 물량의 광고 공세에 짓눌려 있어 그러겠지만, 출입처 위주로 불러주는 대로 쓰는 기자들의 취재방식도 문제가 될 것이다. 물론 문화예술분야도 마찬가지가 된다. ‘예술단체장’, ‘출입처’, ‘기자단’, ‘기자회견’ 등등에만 휘둘리면서, 민중의 혹은 일반관객의 깊은 소리를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는 ‘취재협조’ 관계를 원활히(?) 갖기 위해 쓰야 될 것도 쓰지 않는 경우가 생기고, 맞지 않는 것도 맞다 고 쓰야 하는 경우도 생기게 된다. 여기서 잠시 어느 영화담당 신문기자가 자신의 신문기사에서 미국의 예를 들면서 엉뚱하게 영화평론가를 비판하는 내용을 보자.
이 기사는 “미 영화사 소니픽쳐스가 영화홍보를 위해 가짜평론가를 만들어내 허위광고를 한 대가로 관객들에게 총 150만 달러(약 15억원)를 물어주게 됐다고 미 언론들이 보도했다”라고 되어있다. 그러면서 “이 해프닝은 무조건 찬사에만 열을 올리는 비평가들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고, ‘주례사 비평’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계기로도 비하되었다”라고 해두었다.
한마디로 영화평론에 있어서는 모든 잘못된 ‘리뷰’나 ‘평론’은 ‘비평가’들만의 잘못인 것처럼 해두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문기자들이 써는 영화평론 혹은 영화 프리뷰 등은 어떤가? 영화제작사에서 고정적으로 돈을 받고 쓰는 사이비언론의 영화담당기자들이 검찰의 수사를 받지 않았는가?
문화예술계에 사이비평론가들이 들끓고 있다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모든 비평의 잘못을 평론가의 몫으로만 돌리는 것도 잘못됐다는 것이고, 이 부분은 계속 논리적인 대응을 받아야 한다. 여기서 다시 어느 신문기사에서 방송의 잘못에 대해 지적하는 기사의 예를 보자.
이 기사는 “지난 몇 년 사이 TV에서 ‘성역 없는 비판이라는 말은 상투어가 되었다. 그러나 각종 연예오락프로그램의 선정성 논란이 끊이지 않고, 내부 시스템이 무너지는데도 미디어 비평 프로그램이 자사의 문제점에 대해 지적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방송사들이 바깥의 성역과 금기를 허물어야 한다고 외치는 동안, 스스로 성역이 되어 속으로 곪아가고 있었다”라고 해두고 있다.
그런데 신문 등의 문화예술계 접근방식은 비판 받지 않아도 되는 성역이 되는가? 가장 넓고 깊게 보아야 되는 가장 영향력 있고, 신뢰받는 곳에서 문화예술계의 실상과는 정반대가 되는 기사를 쓰는 경우는 없는가? 그리고 그렇다면,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 글의 마무리는 다시 어느 신문에 난 기고자의 글을 인용하며 마무리 짓겠는데, 그 이유가 결론을 내리기 애매한 경우를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려 마무리 짓자는 것이 아니고, 지금 평자가 이야기하는 글의 내용이 일반 사람들이 바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내용이라는 것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중앙일보 2005년 6월 1일자 시론에 ‘신문혁신은 신뢰도 향상부터’라는 제목으로 실린 글인데, “언론인 스스로가 전문성과 도덕성을 갖추고 독자들로부터 신뢰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인터넷매체의 확산으로 어느 누구나 저널리스트가 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그렇지만 누구나가 ‘전문적인’ 저널리스트가 되지는 못한다. 전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사실 전달의 사명과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전문적인 저널리스트가 신문신뢰성 회복의 열쇠를 쥐고 있다“라는 내용이다.(송종건/무용평론가/dancecritic.com.n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