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발레단 - 오델로
공연 /
2008-10-17 01:58:27
조회 : 11993
Name 무용평론가 송종건
Subject 국립발레단 - 오델로
Homepage http://dancecritic.com.ne.kr
< 국립발레단 - 오델로 >
“연극과 발레의 만남을 표방한다”, “연극연출가인 교수가 총연출을 맡았다”고 하고 있던 국립발레단의 < 오델로 > 공연이 지난 7월 12일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있었다. 질질거리는 대사가 늘어 터져 ‘무용’의 긴장감을 무너뜨리고 있던 이 공연은, 보도 등에 따르면, “발레라는 장르가 관객이 이해하기 쉽지 않은 만큼 연극의 스토리텔링 기능을 더했다”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던 것은 발레가 왜 관객이 ‘이해하기 쉽지 않은 장르’라고 스스로 단정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잘 만들어진 발레만큼 객석에 진한 감동과 투명한 메시지를 던질 수 있는 예술은 없다. 이는 클래식발레 ‘지젤’, ‘백조의 호수’, ‘스파르타쿠스’등에서 바로 확인된다.
문제는 올바른 창작의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연극의 스토리텔링 기능을 더했다는데, 도대체 연극의 어떤 ‘스토리텔링’기능을 말하는가 하는 것이다. 쓸데없이 질질거리는 네러티브(narrative)한 대사를 더 쓰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는 현 시대 연극에서도 그 문제점을 알고 스스로 자제하는 것이 된다.
주지하다시피 모더니즘의 라디오시대에는 ‘말’과 ‘글’이 모든 것이 되어왔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의 TV, 디지털 시대를 맞은 지 오래되는 현 시대는 ‘영상’과 ‘이미지’의 시대이다. 연극이 ‘말’과 ‘대사’로 띄우는 모더니즘 예술이라면, 무용은 모든 ‘말’과 ‘대사’를 제거하고 오직 무용수의 고결한 신체 ‘이미지’와 ‘영상’으로 표현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예술이다.
그래서 ‘무용은 21세기의 예술’이 되고, ‘현 시대의 대표적인 공연예술은 무용’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서구 공연예술 선진국의 연극은 스스로 대사를 생략하고 오직 몸짓으로만 모든 것을 다 표현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식의 ‘공연’은 ‘무용’ 이 된다. 즉 연극의 무용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국립발레단’에서 정말 오랜만에 창작 공연이라는 것을 하면서 네러티브하게 퍼져있는 연극과 만나는 노력을 하고 있었다. 침묵과 상징과 은유의 예술인 무용이 네러티브 하고 서사적인 연극하고 접하면, 타락되는 것은 무용이 된다.
왜 우리나라 국립발레단의 공연이 연극과 만남을 표방 했는가? 스스로의 제작능력이 없었는가? 혹은 그렇지 않으면 유력인사의 부인인 연극연출가와의 친분을 과시하려는 사교 때문이었는가? 지난 10여년 이상 올바른 창작 작품 하나를 무대에 스스로 올리지 못하는 우리의 ‘국립발레단’에 덮여 있는 암울한 창작현실의 그림자를 언제 걷어낼 수 있을까?
‘총연출’을 했다는 사람이 마이크를 들고 나와서, “우리나라의 창작발레를 육성 한다”, “연극과의 만남”, “이유 없이 부인을 의심하는 것”, “좋은 관람되라” 등등의 멘트를 하고 있는데, 정말 공연 전 이런 사설은 ‘침묵의 예술’인 무용공연으로서는 괴롭고 생소하기만 하다.
탑 조명을 받으며 무용수들이 움직인다. 10여명의 군무들이 한 여인을 허공에 들고 움직이는 것은 깨끗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 무대 밝아지고, “지금까지는 내가 아버지의 딸이다”, “아비를 속인 년이 남편인들 못 속이겠는가” 등등의 대사가 나오면서 무용의 긴장감은 무너진다.
무대 좌측에서 검정 의상과 반나체 의상의 두 명이 서로를 질질 끌거나 굴리면서 움직이다가, 검정 의상이 ‘악’ 하고 고함을 지르는데 객석에서는 짜증나기만 한다. 무대 우측에서 남녀 2명이 애정 행각을 펼치기도 하고, 흰 수건을 던지고 주우면서 스토리를 엮어 보기도 하는데 세련된 스토리 연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는다.
여자 1명이 의자에 앉아 움직이기도 하는데, 등장인물의 캐릭터를 확인하는 것은 어렵기만 하다. 남자가 들어와서 둘이가 서로 안고 부비고 있는데, ‘여관 수준’의 안무가 된다. 괜히 심각한 표정으로 엉키는 모습이 되기도 하는데, 객석에 투명한 메시지를 보내지 못한다.
“아, 푸르고 푸른 버들잎”, “죄는 내게 있어요” 등의 대사가 이어지기도 하고, 여자가 대사가 끝나자 남자 둘이가 뭐라고 읊조리면서 적당히 움직이는데, ‘말’ 이 들어가서 작품의 의미가 더 명쾌해 지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더욱 거칠고 무리해지는 느낌이 있다.
폭풍우 속 물결치는 소리 들리는 가운데 군무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이 이어진다(이 공연에서 국립발레단 단원들은 ‘무용수’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런데 곧바로 배가 파선하는 연극적 분위기로 돌아가, “아비를 속인 인간이 남편인들 못 속이겠는가?”, “빌어먹을 세상” 등의 대사와 함께, 작품은 퍼져버린다.
이런 퍼져버린 분위기의 여파 때문인지, 남녀 3쌍의 군무가 이루어지는데, 왜 지금 저 움직임이 있어야 하는지 하는 설득력이 사라져 버린다. 2인무가 이어지고, 또 “기운내세요”, “노인네가 질투는 안 된다” “나는 증거를 찾는다” 등의 소리가 나오는데, 무용 예술의 순수함 곳곳에 ‘항생제’ 같은 것이 덩어리 채 담겨져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고, 객석에서는 도저히 무용수들의 움직임이나 자태에 집중할 수 없다.
계속해서, “살인이다, 살인”, “피는 나지만 죽지 않는다”, “나는 바보였어” 등등의 대사가 신파조로 난무하고 있던 이 공연은 ‘연극’의 쓸데없는 도움(?)을 받은 무용이 예술적 진을 빼고 있는 모습이었다. 겉멋만 들은 전개에 무용의 예술적인 힘과 감동이 죽어버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근래 우리나라 국공립무용단은 ‘공연을 안 하는 것’이 목표인 것처럼 하며, 공연을 안 하고 죽어있는 모습이다. 국립무용단, 국립발레단, 서울시무용단 등등 모두 공통적이다. 특히 올바로 된 창작무용을 스스로 올려 무용 관객들의 사랑을 받는 경우는 지난 10여 년 동안 거의 볼 수가 없었다.
이번에 국립발레단에서는 정말 오랜만에 공연을 하면서 세계 어느 나라 주요 발레단에서도 하지 않는 경우를 했다. 첫째, 이미 앞에서 보았지만, 발레만으로도 해야 할 일이 태산 같이 쌓여있는데도 ‘연극’에 많은 것을 맡기고 있는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정말 어쩌다 한 개 만든 공연도 - 이때는 작품의 질을 떠나서 - 거의 대부분을 외부 안무가에게 맡겨 버렸다는 것이다. 현재 국립발레단은 ‘홍보’는 잘하는지, 신문을 보면 뭘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걱정되는 것이 너무나 많다.(송종건/무용평론가/dancecritic.com.ne.kr)